# 1일차(비중 1.049) - 순옥내가 여러 취미 가운데 요리하는 것, 그리고 그와 관련되어 있는 여러 활동 중 술을 빚는 일을 택하게 된 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는 수순인지도 모른다. 술을 빚을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발효(醱酵)이다. 발효는 ‘술을 빚다’는 뜻의 발(醱)과 술을 삭힌다는 효(酵)가 결합한 말인데 술을 빚고 이를 삭힌다는 것은 술의 맛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은 고되고 힘든 일이다. 예전에 외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종종 집에서 술을 직접 빚곤 했다. 외할머니는 오랜 기다림 끝에 술이 탄생한다는 점에서 술빚기를 자식 낳는 일에 자주 빗대곤 했다. 나의 모친도 이를 깊이 공감하였는지 나를 품고 있던 열 달 동안 막걸리를 즐겨마셨다고 한다. 덕분에 엄마의 몸 속 깊은 곳에서 꼬물거리던 아주 작은 생명체일 때부터 나는 술맛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술을 빚는 일의 시작에서 ‘엄마’를 떠올리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리라.순할 순에 구슬 옥, ‘순옥’은 엄마의 이름이다. 이름에 담긴 뜻처럼 엄마의 성정은 당신의 이름과 매우 닮았지만 엄마의 생은 그와 정반대였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서무교사로 일하던 엄마는 천하의 한량인 남자와 연을 맺었다. 외갓집에서 남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당시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제일가는 싸전*1을 하고 있었다. 외가는 소위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엄마는 외조부모가 마음고생 하는 것을 그만 보고 싶다며 몇몇 선 자리를 마다하고 그와 덜컥 혼인을 해버렸다. 이후 뒷이야기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일대기를 통해 그야말로 모진 고생을 겪으며 두 자식을 장성시킨 어머니의 이야기가 쓰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순옥’이 아닌 ‘명자’나 ‘말자’에게도 찾을 수 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서 일터의 고됨을 씻어버린 후 ‘카프리’ 맥주 한 병을 시원하게 마시던 ‘순옥’의 모습에 대해 쓰고자한다.카프리. 투명한 병에 카프리(Cafri)라고 적힌 하얀색 상표가 붙어 있는 맥주. 병뚜껑도 하얀색인데다 유리병 위에 양각으로 ‘고급맥주’라고 적힌 영단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면 불투명한 갈색 병에 담긴 맥주들과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 든다. 웃긴 것은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카프리섬은 ‘Capri’라고 쓴다. 아마 자유라는 의미의 ‘Free’를 결합한 새로운 조어를 맥주의 이름으로 붙인 모양이다. 내가 카프리 맥주를 볼 때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엄마에 관한 일화가 있다. 항상 엄마는 딱 한 병의 카프리 맥주를 사서 유리컵에 따라 드셨다. 당시 ‘카프리’는 병나발이 가능하도록 트위스트형 뚜껑에 병을 들고 이동이 용이하도록 330ml 용량으로 출시된 맥주였다. 그런데 엄마는 “아, 난 잘 모르겠고, 그런 거 관심도 없고”의 확고한 태도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맥주를 들고 귀가하시곤 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학생과 거리가 멀었다. 친구들과 동네 뒷산에 모여서 술을 사다 마시는 때가 엄마의 음주횟수보다 많았고, 맥주, 소주, 막걸리, 와인 등 주종 또한 가리지 않았다. 잔뜩 마시되 들키지 않을 정도로 마시는 것이 우리가 세운 중요한 원칙이었다. 이 원칙을 고수한 덕분에 한 번도 꼬리를 밟힌 적이 없었으니, 시중에 출시된 술은 거의 다 마셔볼 수 있었다. 당연히 카프리 맥주는 아주 오래전에 무너뜨려 쉰내가 풀풀 나는 금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맥주 회사가 카프리 맥주를 출시할 때 내놓은 특징과 맛있게 먹는 방법들을 엄마에게 알려드리고 싶었다. 엄마가 훨씬 기분 좋게 맥주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가 맥주를 사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나는 “엄마, 왜 항상 카프리만 마셔?”라고 물었다. 뒤이어 돌아온 엄마의 답은 묵직했다. “이 맥주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내 인생이 덜 불쌍했으면 좋겠어서.” 라고 말하며 엄마는 무심하게 맥주병을 바라보았다. 그 때, 처음으로 엄마의 하루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사업에 재능이 없던 한량이 벌려놓은 일들을 수습하는 사이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러자 엄마는 자식들을 굶길 수 없어 지인에게 일자리를 소개받았고, 한 달에 한 번의 휴무를 제외하고 매일 14시간씩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게다가 제법 운동으로 이름이 알려진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하며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던 동생까지 뒷바라지 했으니 엄마의 몸은 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겨우 버티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곁에 놓인 투명한 병의 술이 외롭고 쓸쓸한 엄마의 곁을 잠깐이나마 위로해주는 벗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때의 나는 철이 없었고, 엄마의 삶의 무게를 나누기엔 정신적으로 미숙했다.어느 덧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된 엄마의 곁에 더 이상 맥주의 자리는 없다.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이나 되어야 가족들의 분위기를 맞춰줄 요량으로 내가 마시던 맥주 한 모금으로 목만 축이신다. 가끔 옛 생각이 나서 카프리 맥주를 사가지고 가면 엄마는 내게 “넌 뭔 맛으로 술을 그렇게나 마셔 대냐? 맛도 없는 술을.”하며 타박을 하신다. 지금의 내 나이 즈음 쓰디 쓴 술을 그렇게나 마셨던 엄마의 말에서 나는 많은 위안을 얻는다. 이젠 엄마의 삶이 그리 쓰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엄마를 찾아뵙는 날이면 카프리 맥주를 사간다. 하얀색 병에 비친 엄마의 모습을 보는 나의 기쁨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한다. *1 싸전(싸廛) (명사) 쌀과 그 밖의 곡식을 파는 가게 (표준국어대사전 인용) 글.그림 | 송재영 (www.facebook.com/jogakbaram) 극단 조각바람 프로젝트 동인 일상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담아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극작 <뒤뚱이의 편지>, <979의 일기>, <플라워가든>, <아일랜드> * 위 내용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2020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예술로(路) 협업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