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차(비중 1.043) - Alban Vicente 알보. 그는 자신의 이름 대신 ‘두비’라고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가방에 자신의 분신과 같은 인형을 달고 세계를 일주하고 있었는데 그 인형의 이름도 두비였다. 내가 술을 빚는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알보’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눠 마셨던 맥주에 얽힌 인연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그는 프랑스 남부 지역인 툴루즈에 산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고향의 작은 교회에 묻혀있다. 간질을 앓고 있던 그는 매일 약을 복용해야 했다.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던 그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고 끝내 호흡이 제대로 돌아오지 못해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나는 몇 해에 걸쳐 그의 SNS에 회신을 기다린다는 글을 남기곤 했는데 영문을 모르는 날 위해 그의 친구가 직접 메시지를 보내주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2년 7월 4일, 잭 존슨(Jack Johnson)과 프로레슬링을 사랑했던 그가 지구별을 떠났다. 우리는 호주의 브리즈번에서 약 200km 떨어진 먼더버라(Mundubbera)의 캠핑존에서 만났다. 그는 허름한 승합차를 개조해서 차에 침대를 두고 자동차 여행을 하고 있었고 나는 호주의 북쪽으로 자유여행을 하며 이동 중이었다. 2006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였는데 호주의 겨울은 우리나라와 달리 아주 건조하고 덥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차에서 생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비오는 날이 며칠 이어지면서 나 또한 여정을 이어가지 못하고 카라반을 구해 잠시 머물고 있었다. 먼더버라 지역은 농장이 많은 곳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연장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따라서 차량 소유가 필수적이었고 근방에 쇼핑센터나 대형마트는 눈 씻고도 찾기가 어렵다. 나 또한 농장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차를 빌려 타고 이동하던 중 일행과 갈라지는 지점인 그 곳에 머물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곳에서는 먹거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은 터라 나는 사흘에 한 번꼴로 왕복 두 시간을 걸어가야 나오는 작은 가게에서 식자재를 구입해오곤 했다. 조금 비싸게 값을 치르면 개인 주방과 욕실이 딸린 독채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캠핑족들은 저녁이 되면 공용주방을 이용해서 음식을 해먹어야 했다. 그 날은 마침 마트에서 운 좋게 구한 삼겹살을 먹으려고 굽고 있었다. 비상용으로 챙겨온 고추장에 농장 일을 다녀온 독일 대학생들이 나눠준 채소까지 구비되었으니 완벽한 한상이었다. 목이 얼얼할 정도로 차게 해둔 맥주 한 팩을 옆에 두고 그 중 한 병을 까서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 그리고 채소에 고기를 크게 싸서 한 입 먹으려는데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청년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 앉아서 기타를 연주하며 저녁식사를 하는 그의 모습은 무척 생경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그 간의 여정을 돌아보게 되었다. 호주에 입국해서 여행경비를 모으기 위해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육 개월 동안 일을 하며 매일 녹초가 되던 내 모습은 사실 여행자로서 내가 그린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꿈꾸었던 여행자의 모습은 바로 알보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이끌림을 느꼈고, 식사를 멈추고 그에게 다가가 같이 술을 마시자며 맥주 한 병을 권했다. 그는 흔쾌히 응했고 그렇게 우린 가까워졌다. 그 날 우리는 맥주 한 상자를 비우고 와인 한 병을 더 마셨다. 그는 이동 중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 곳에서 잠시 머물며 만다린과 망고를 따는 일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곧 떠날 예정이었음에도 나 또한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알보는 같이 독채에 머물 친구를 구하는 중이라고 했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같이 머물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린 같이 지내며 함께 일을 하고 음식을 해서 나눠 먹었다. 그는 어두운 밤이면 기타를 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했고, 나는 쏟아지는 별을 보며 그의 곡을 감상하다 잠들곤 했다. 약 삼 개월 간의 동거가 끝난 후 나는 다시 북쪽으로 그는 남쪽으로 향했다.나는 그와 보냈던 시간과 처음 나눠 마셨던 술을 집에 돌아와서도 줄곧 떠올렸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은 열망이 강했지만 외국에서 만난 친구를 재회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본에서의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국에 들러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때가 2010년 가을이어서 추석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이를 알고 있던 그는 우리의 명절을 경험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한국의 문화를 즐길 수 있을 지를 궁금해 했다. 나는 그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 큰외삼촌이 계신 전라북도 부안의 외갓집으로 데려갔다. 알보와 함께 외가에 내려가니 동네는 금방 난리통이 되었다. 작은 집성촌 마을에 장발에 수염을 기른 눈이 파란 청년이 마을이장의 집을 방문했다는 소식에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나온 것이다. 큰외삼촌은 내가 친구를 데려온다고 하니 친구의 집에서 명절을 쇠러 온다는 놈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고 하시며 날 보고 웃으셨다. 내가 외국에서 온 친구라고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던 모양이었다. 삼촌께 제대로 알리지 않은 탓에 친척 누나들과 매형은 허둥지둥 거리며 상을 차렸고 조카들은 알보를 따라다니며 사인을 해달라고 졸랐다. 정신없이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내 눈에는 너무나 많은 음식들이 상에 오른 데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반찬들이 많아 보였다. 거의 평생을 프랑스에서 살아온 청년이 자신의 앞에 놓인 간장게장을 자연스럽게 입에 가져가서 쪽쪽 빨며 먹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손에 장갑을 끼고 그의 접시에 게살을 발라주고, 겉절이를 손으로 찢어서 맨밥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조기의 살을 발라서 그의 입에 넣어주려고 할 때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저지하며 자신은 아기가 아니라며 제법 강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초대한 것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호주에 함께 머물 때처럼 존재 자체로서 서로의 문화와 방식을 존중하며 자유롭게 지냈던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식구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상을 떠난 뒤에도 우린 한참 동안 식사를 하며 오랫동안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대로 홍어무침과 꼬막을 열심히 먹었다. 이듬해 초여름이 되자 알보가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번엔 부산에 가서 수영과 서핑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지 물었고 그는 혼자 즐기고 싶다고 했다. 세워둔 계획이 많으니 첫 날 창경궁을 함께 구경하자고 했고, 마지막 날에 작별인사를 할 겸 술을 한 잔 하자고 했다. 그의 말대로 우린 같이 창경궁을 함께 걸었고 그가 떠나기 전 날, 혜화동의 마로니에 공원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린 식사를 마치고 공원을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는데 아르코예술극장 앞은 기타를 치며 거리공연을 하는 연주자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알보는 갑자기 손을 들더니 자기가 한 곡 연주를 해도 되는 지 거리의 연주자에게 물어보았다. 그 연주자는 제법 유명인이었는데 흔쾌히 알보에게 기타를 건네주고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유도했다. 알보는 기타를 조율한 뒤 잭 존슨의 Better Together를 노래했다. 불빛하나 없던 호주의 시골 농장에서 그에게 자주 불러달라고 부탁했던 곡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앵콜을 외쳤고 그는 불어로 노래를 한 곡을 더 부르고는 수줍게 기타를 돌려주었다. 갑자기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린 서로 한참동안 수다를 떨었고 나는 그의 숙소 앞에서 그와 포옹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나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나의 청춘에 그가 내 곁에 있어 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살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나눈 추억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두 번째 방문했던 그에게 내가 물었다. 한국에 왜 또 온 거냐고 말이다. 그는 말했다. “여기에 네가 있잖아.”라고. 글.그림 | 송재영 (www.facebook.com/jogakbaram) 극단 조각바람 프로젝트 동인 일상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담아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극작 <뒤뚱이의 편지>, <979의 일기>, <플라워가든>, <아일랜드> * 위 내용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2020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예술로(路) 협업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