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일차(비중 1.022) - 뽀꼬 나는 누군가 ‘군대’에 간다거나 입대한다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진다. 자의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군생활을 강제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가 단체생활을 극도로 꺼리는 인간이라는 점도 한몫한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메뉴의 밥을 먹고, 같은 생각을 교육받고 잠까지 같이 자야 하는 일을 생각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내 생각과 상관없이 나 또한 여느 대한민국의 남자처럼 의무적으로 병역을 마쳐야했다.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살을 찌우려고 몸무게를 늘려보기도 했지만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술과 고기 같은 고열량의 음식을 매일 섭취하다보니 몸은 축나고 관절들이 급격하게 틀어지면서 아파왔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군대에 가기 싫어서 온갖 애를 썼지만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다 싶어 그만두고 대학교 2학년 때 자진해서 입대를 했다. 뉴스에 나오는 병역기피자들은 단언컨대 진짜 독종이라고 할 수 있다. 입대를 신청해놓고 흥청망청 술이나 퍼대며 놀고 있었는데 결국 입영통지서가 집에 도착했다. 착잡한 마음에 찬찬히 읽어보는 데 내가 가야하는 훈련소의 주소는 논산이 아닌 창원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창원까지 버스로 네 시간, 논산은 버스로 두 시간이 걸렸는데 입대 후 휴가를 나온다고 치고 계산해보니 적잖은 시간이 이동에 소비되는 것이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이왕 가기로 한 거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하자는 마음으로 2002년 8월 8일 창원에 있는 훈련소에 들어갔다. 6주간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동기들과 함께 타고 있던 육공트럭에서 갑자기 심한 비린내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트럭이 통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통영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통영 시내를 지나 겨우 도착한 부대에서 호명한 순서대로 한 명씩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었던 터라 내리면 밥부터 먹겠구나하고 생각했는데 내 이름이 불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트럭의 문이 잠기더니 다시 나머지 인원을 실은 차가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는데 날이 어두워져서 주변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제법 오래 걸린다고 느낄 무렵 도착한 곳은 거제였다. 그 곳에 나와 다른 세 명의 동기가 마지막으로 내렸다. 지금은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지만 자대에서 첫 휴가를 받아서 집에 올 때 6시간이 걸렸고,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데 버스가 거제에 당도하자마자 주유를 한 뒤 터미널을 향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렇게 멀리 찾아간 거제에서 나는 ‘뽀꼬’를 만났다. 그의 진짜 이름은 ‘FOCUS’. 군대에서 군번을 갖게 되는 것처럼 군견인 그는 견번을 갖고 있었다. 그의 견번은 9754인데 이는 97년도에 태어난 54번째의 개라는 뜻으로 나는 뽀꼬의 견번을 아직까지 내 휴대전화의 뒷자리로 쓰고 있다. 나는 군대 부적응이 점차 심해지던 일병을 달았을 무렵에 군견병에 지원하였다. 군견병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군견과 단 둘이 움직이고 훈련하기 때문에 조금 숨통이 트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훈련과 테스트를 거쳐 정식으로 군견병에 선발되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선임은 정식 견명이 아닌 뽀꼬라고 부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리 부르기 시작했고, 그 이름은 점차 고유명사처럼 느껴졌다. 뽀꼬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일이 있다. 군견병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대지역인 거제에 밀입국자가 출현했었다. 당시 해당 지역의 전 부대가 출동해서 신원불상자를 찾아 나섰고, 나는 뽀꼬와 함께 수색대 선발로 부대의 최전방에서 하루 종일 해변과 산턱을 오르내렸다. 지명수배를 받던 그는 결국 통영 근처 검문소에서 검거되었고 나와 뽀꼬는 그 날 자정이 다 돼서야 부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종일 밖에서 뛰어다녔던 뽀고를 위해 견사에 물을 채워두고 고생한 그의 털을 가려주며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는데 뽀꼬의 눈이 심하게 충혈 되어 있었다. 예민한 성격을 가진 탓에 잠을 못자고, 식사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식사량이 평소보다 배로 늘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체할까봐 사료를 물에 불렸고, 먹는 동안 그릇을 일부러 여러 차례 빼앗았다. 식사시간만 40분이 넘었고, 배변까지 약 1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 날 비가 무척 많이 왔고, 덩치가 큰 녀석이 계속 내 무릎 위에서 잠을 자려고 몸을 비비적거렸다. 정확치 않지만 뽀꼬의 키는 130cm 정도였고 몸무게는 36kg이 넘었었다. ‘수색견’이었으며 춘천 군견훈련소에서 최고 우수 군견으로 수상을 한 경험이 다수 있었고, 내가 함께 했을 때는 4등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꽤 유명한 파트너여서 훈련이나 쇼케이스에 다수 참가한 덕분에 그 공로로 휴가도 많이 받았다. 1년에 한 번 군견병들은 춘천에 있는 훈련소에서 테스트를 받아야 했는데 생판 모르는 이들과 한 공간을 쓰는 것은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뽀꼬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꼭 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나를 담당했던 지도 간부는 뽀꼬가 훌륭한 군견이라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아울러 내가 너무 스트레스나 압박을 줘서 자질을 감추지 않게 하라고 조언까지 해준 기억이 있다. 그는 군견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은 주인을 닮기에 주인의 성향이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잘하려고만 하면 이들이 압박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그 때 무언가 기르고 키우는 일, 보듬고 사랑을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군대에서의 시간은 멈춤없이 흘러갔고 나도 전역을 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후임병은 뽀꼬를 맡은 지 6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 그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사인은 고창증으로 급하게 음식을 먹인 것이 화근이었다. 고창증은 갑자기 복부에 가스가 차는 병으로 개들에겐 치명적인 병이다. 입이 짧은 뽀꼬에게 빨리 사료를 먹이기 위해 우유, 달걀, 참치 통조림을 주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 날 유난히 밥을 먹지 않아서 후임이 사료에 잔뜩 우유를 타줬다고 했다. 고창증은 가스가 차오르는 게 육안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응급처치 교육받을 때 가장 먼저 배운다. 배를 바늘로 찌르면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데 아마 그는 당황해서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뽀꼬가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갑자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곧이어 후임은 뽀꼬가 춘천에서 화장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곧장 춘천으로 향했고, 겨우 당도하니 이미 화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뽀꼬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대신 텁텁하고 불쾌한 연기 앞에 서야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예전의 사진첩을 뒤적거렸다. 그가 내 곁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동안 나 또한 성장하고 있음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지금에서야 사진 속 까까머리의 내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군견으로서 힘들었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자유를 찾아 뽀꼬가 떠나가는 날 그에게 술 한 잔 대접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었는데 이제야 그를 위한 술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다고 생각하는 뽀꼬에 관한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기억에 오류가 있을지 몰라도 정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깊은 바다 같은 눈을 가졌던 나의 아이 뽀꼬를 추억한다. 글.그림 | 송재영 (www.facebook.com/jogakbaram) 극단 조각바람 프로젝트 동인 일상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담아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극작 <뒤뚱이의 편지>, <979의 일기>, <플라워가든>, <아일랜드> * 위 내용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2020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예술로(路) 협업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