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에 대한 비유 “남자가 연필로 대략적인 밑그림을 스케치한다면 화려한 색깔로 채우는 것은 여자예요. 한 폭의 그림을 같이 만드는 존재지요. 둘 모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왜 보편적으로 남자가 리드를 하고, 여자는 팔로우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그 대답을 해준 이는 나보다 오래 탱고를 춘 선배였는데, 그마저도 어디선가 들은 얘기라고 했다. 나는 반문했다.“색칠보다 밑그림 그리는 게 더 좋은 여자도 있을 수 있잖아요?”그가 답했다.“…그럴 수도 있겠네요.”그리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나는 의심한다. 보편적으로 남성이 리드하는 경우가 많고, 여자가 팔로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성 역할 고정관념 때문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으로, 성 역할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공연을 준비하며 그 과정과 결과를 촬영하여 기록영상물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즉, 내가 리더가 되어 탱고 공연을 하는 것이다.‘주 5탱’ 하며 여러 스튜디오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중 B스튜디오에서 11월쯤 개관 1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열 계획이라며, 원하는 수강생들은 공연을 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곳은 남자들 수가 여자보다 많아 남자들끼리 리더와 팔로워를 하며 수업을 진행해 온 곳이었다. 마침 그곳에 팔로우를 잘하기로 소문난 남성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공연 파트너가 되지 않겠냐고 건의했다. 다행히 그가 수락해주었고 일주일에 2~3일씩 따로 만나 연습을 진행하게 되었다. 나의 첫 번째 파트너 그와 함께 연습하기로 뜻을 모은 것은 7월 말이었다. 공연 예정 시기는 11월 전후. 리더고 나발이고, 아직 잘 걷지도 못하는 실력이었다. 리더로서 공연할 실력을 3개월 내로 갖출 수 있을까? 막상 연습하다 보니 걱정되기 시작됐다.확실히, 리드가 더 어려웠다. 리더는 밀롱가 플로어의 상황을 수시로 체크해야 하고, 방향 감각이 있어야 하며, 음악에 따른 정확한 신호를 한발 앞서 팔로워에게 제안해야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간지’도 챙기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춤을 즐기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리더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진입장벽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훌쩍 넘고 나면 매우 많은 권한과 자유가 주어질 것 또한 알고 있다. 역시 이거 가부장제와 비슷한 구조인데?애석하게도 연습을 하는 동안 내 실력이 향상되는 속도 보다 관계가 달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밀폐된 공간에서 둘이 신체접촉이 있는 춤을 추기 때문일까? 파트너는 “가끔 이 관계가 연애와 헷갈린다.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경계선을 넘을까 봐 걱정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나는 “선 넘으면 손모가지 잘라버리겠다”고 답해주었다. 그는 조심하겠다고 했다. ▲ 첫 번째 파트너와 나 결정적으로 관계에 금이 간 것은 다른 일 때문이었다. 그와 내가 실력 차이가 있고, 그가 나보다 잘 추기 때문에 가르치려 드는 것은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잘 추는 여성과 나를 비교할 필요가 있나? “F님이랑 출 때는 마음이 너무 편하다. F님이 내가 뭘 할지 다 알고 다 받아줄 것 같으니까”라며 F님과 나를 비교하기에, 나는 ‘개빡치니까’ 비교 좀 하지 말라고 진심으로 성냈다. 그는 “다 님 잘 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꼰대 같은 말을 하며, 그렇다고 험한 말로 응수할 필요 있냐고, 충격받았다고 말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러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다시 급증했다. B 스튜디오 대표는 ‘이 시국에’ 1주년 행사를 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 같다며 계획을 수정했다. 공연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사라진 상황, 서로 관계에 금도 생겼겠다 연습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때가 9월 말이었다.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며, 그가 다니는 B스튜디오의 수강을 그만두고 다른 스튜디오 수업에 나갔다. 물론 (전)파트너에게는 말하지 않은 채였다(둘이 서로 말도 안 섞던 시기였다). 그런데 새로 간 스튜디오에 그가 먼저 와 있었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서로 웃으며 화해했지만 그래도 다시는 파트너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말했다. 파트너를 전전하는 이야기? 파트너도 잃고 당초 목표였던 공연도 취소되자, 내 작품은 어디로 가는 건가 고민이 됐다. 한 편으로는 공연이 취소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왕 공연하는 거 ‘간지’나면 좋겠는데, 엉성한 실력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시간을 번 것일 수도?공연 방식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사실 성 반전 방식으로 공연하는 것 또한 성별 이분법적이지 않나? 정말 이분법을 ‘해체’한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별 이분법을 제대로 해체하는, 진정 대안적인 공연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동성과 함께 한 곡 내에서 리더와 팔로우를 번갈아 하며 ‘공정한’ 무대를 꾸리는 것이 방법일까? https://youtu.be/akmJBK2CLM8▲ 동성 커플이 리더와 팔로워 역할을 여러 번 교체하는 무대의 사례 문득 정신 차려 보니 리드를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며 팔로우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점점 팔로우 실력이 늘며, 팔로우에 더욱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팔로우는 제한된 자유이긴 하지만, 부담을 덜 느낄 수 있었고 춤에 집중하기도 수월했다. 소위 ‘여성성’을 표출하는 움직임과 장식 동작에도 재미를 느꼈다. 몸의 선을 드러내어 강조하거나, 밝은 색상으로 반짝이는 탱고 아이템도 수집하게 됐다. 탈코르셋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는 입장이면서 이래도 되는지,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말이다. ▲ 반짝거리는 핑크색 탱고화. 결코 싼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새로운 파트너가 생겼다. 그와 언제, 어떤 모습이 될지는 모르지만, 함께 대안적인 공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이 연습하며 내 실력이 향상되는 것도 느낀다. 그런데 이 사람, 자꾸 같이 술 마시고 싶어 하고 나와 연애를 원하는 듯 암시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손모가지 잘리고 싶나? 이 사람이랑 언제까지 파트너십을 이어갈 수 있을지, 공연까지 할 수 있을지 불안해지는 요소다.내 작품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이 작품의 중심 이야기는 내가 파트너를 전전하는 여정이 되는 걸까? 아니, 작품이 완성될 수나 있을까? 혼란스럽다. 혹 작품에 대해 조언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facebook.com/monthlyingyeo로 페메 주십시오! (단, 주의사항- 영양가 없는 소리 하면 차단할 수 있음) 글 | 최서윤 (instagram.com/monthlying)“이건 아니지 않나?” 생각이 들면 못 참는 편입니다. 칼럼으로 생각을 나누거나, 창작물로 감정을 표출하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빈정대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 공동 저서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미운 청년 새끼> <흙흙청춘> 등이 있습니다.2015 수저게임 facebook.com/gamespoon2016 영화 <영화학개론>2018 영화 <망치>2019 스탠드업 코미디 <불효자는 웃습니다> * 위 내용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2020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예술로(路) 협업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