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타기의 시작 : 사진과 커피의 리듬> 아날로그와 사진 종종 자신을 소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보통 가지고 있는 명함을 꺼내어 내밀며 자신의 직업을 먼저 이야기할 것이다.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자신을 스스로 소개해야 할 때면 “아날로그를 기반으로 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사진가라고 말하면 단순하고 간결한데 굳이 ‘아날로그’라는 단어를 붙인다. 그럴 때면, 나의 소개를 들은 사람들의 눈동자는 순간 약하게 흔들리며 아주 잠깐 동안 자신이 생각하는 ‘아날로그’라는 단어와 ‘사진’이라는 단어에 각각 연상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 같이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는 소리 ‘아날로그’와 ‘사진’이란 단어에서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는 필름 카메라, 어둡고 빨간 조명의 암실, 혹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레트로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라거나 공포 영화에서 소비되어 무섭게 보이는 암실의 이미지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암실에서 사진 수업을 할 때면,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 사실 암실은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나에게 암실은 낭만적인 공간도 아니고 무섭거나 공포스러운 공간도 아니다. 그저 정직하게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공간이다. 그곳에는 아주 적은 양의 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수도에서 틀어져 나오는 물이 사진에 부딪히는 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인화지에 빛을 비추고 물속에 조심스레 인화지를 잠기게 한다. 1초 혹은 0.1초 단위로 잘게 나누어진 숫자가 흘러가는 것을 집중해서 바라보며 생각하는 건 그저 시간, 시간만 생각하고 있다. 그때 문득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온도를 맞추고 시간을 더하고 필름을 카메라에 넣고 촬영하려면 필름을 끼우고 감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지막 컷까지 촬영이 끝난 필름을 다시 카메라에서 첫 컷까지 되감고 꺼내진 필름은 현상을 위해 다시 현상 릴에 감긴다. 몇 번의 되감기 작업이 끝나면, 그제야 필름은 현상할 준비가 되어있다. 현상할 준비가 끝난 필름이 앞에 놓이면 이제 본격적인 암실 작업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다. 약품과 물을 희석하고 온도를 20도로 맞추고 일정한 농도의 약품을 각각의 비커 혹은 바트에 나누어 담고 규칙적으로 흔들며 교반 한다. 한 장의 사진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에 시간을 더하는 과정들이 계속 이어진다. 나에게 사진은 단순히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로만 존재하지 않고 찍힌 순간 이후에 더해지는 과정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시간의 결이기도 하다. 리듬을 즐길 수 있다면 언제부터일까.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핸드그라인더를 이용해서 원두를 곱게 갈고, 포트에 물을 채워 데우고, 데워진 물을 다시 컵과 서버에 나누어 담아 따뜻하게 만들고 나면, 천천히 손을 둥글게 둥글게 움직이며 커피를 내린다. 한 방울 두 방울 서버에 모인 커피를 머그잔으로 옮겨 담고 물을 조금 희석해 농도를 맞춘다. 이렇게 커피를 내리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커피를 맛보고 싶은 욕구보다 커피를 만드는 과정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암실에서 약품을 준비하고 물의 온도를 체크하고 천천히 집중해서 한 장의 사진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마치 원두를 곱게 갈고 물을 준비해 데우고 천천히 핸드드립으로 한 잔의 커피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매우 닮았다 느낀 건,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 동작이 암실에서 몸을 움직일 때만큼 익숙해졌을 때이다. 물을 데우고 온도를 맞추고 물을 나누어 담으며 반복되는 동작들과 흘러가는 시간들. 그리고 기다림. 기다림. 동작과 동작 사이의 틈과 다음 동작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동선들 그런 순간들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이 모든 것이 내게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춤을 추는 거야.” 뮤지션 이랑은 <신의 놀이> 뮤직비디오 속에서 직업인들이 자신들의 직업 활동에서 반복하는 동작들을 현대무용으로 만들었다. 각각 다른 동작들은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하나의 춤이 된다. 사진의 리듬과 커피의 리듬을 맞추다 보면 나의 작은 삶 속에서 리듬은 자연스레 이어지며 흘러간다. 나의 사진도, 커피도 리듬을 맞춰 흘러가다 보면 하나의 춤이 되지 않을까.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야.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멈춰버려.” – 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중에서 사진을 찍는다. 커피를 내린다. 사진을 만든다. 커피를 마신다. 천천히 집중해서 반복적으로. 이미 몸에 익숙해진 동작들은 망설임 없이 다음 동작으로, 또 그다음 동작으로 연결되며 이어진다. 파도를 타다 보면궁금증이 생긴다. 사진과 커피가 나의 삶 속에서 리듬을 만들어냈다면,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직업과 취미는 어떻게 연결될까? 누군가에게는 취미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직업이 됨으로써 삶의 방식들은 다시 또 연결될까? 이 프로젝트는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이제는 추억으로 사라져버린 싸이월드를 즐겼던 사람들은 모두 파도타기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모르는 사람들과 팔로우를 맺고 최근 게시물 위주의 전체 피드를 보는 요즘의 SNS와는 다르게 싸이월드는 지인들과 일촌을 맺으며 시작한다. 일촌의 홈을 방문해 그의 일촌의 홈을 구경하고, 또 그 사람의 일촌의 홈을 방문하고 그렇게 파도를 타다 보면 애초에 시작이 누구였는지는 잊어버린다. 파도타기는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파도를 잘 타다 보면 세상 모두와 연결될 수도 있다.내가 만들어낸 사진과 커피의 리듬이 누군가의 리듬과 맞닿으면 리듬은 또 다른 리듬으로 변형되기도 할 테지만, 계속 연결된 리듬들은 어떤 춤이 될까? 마치 파도타기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연결된다. 파도의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파도타기의 즐거움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는 데 있으니까. 글 | 김다혜 (www.instagram.com/daldahye)아날로그를 기반으로 한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 위태로운 것에 온도를 더하는 고민을 이어오고 있으며, 개인이 가진 이야기를 통한 연결에 관심이 많다. 2020 <BLUE LETTER> 프로젝트 2019 <사물의 기억> 개인전2018년부터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 SAC에서 클래식 프린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 위 내용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2020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예술로(路) 협업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